박래현
도쿄 채색화 교육과 《단장》
박래현(1920-1976)은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수학하며 채색화를 배웠습니다. 식민지 시기 일본 유학을 통해 미술 교육을 받은 그는 1943년 인물화 《단장》으로 큰 주목을 받으며 예술적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식 표현에서 벗어나 한국화의 현대성을 모색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여성의 가사 및 돌봄 노동과 예술 활동 사이의 불균형 속에서도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매체 실험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노점》의 일상과 기하학
1950년대 전후 한국화의 현대화 논의를 흡수한 박래현은 일상의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1956년 수상작인 《노점》은 시장의 인물들을 기하학적인 면으로 연결하고 분할한 대표작입니다. 종이 위 맑은 채색과 먹의 번짐, 그리고 선이 큰 여백을 어떻게 나누는지 살펴보면 서구의 큐비즘을 한국화의 재료와 생활 경험으로 번역해 낸 작가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행, 비엔날레와 추상
1960년대에 들어서며 박래현의 작업은 추상으로 나아갑니다. 국제 비엔날레 참여와 해외 이동은 그의 세계미술 접점을 크게 넓혔습니다. 특히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와 미주 여행은 서구 현대미술을 직접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작품들인 《잊혀진 역사 속에서》, 《영광》 등에서는 원, 씨앗, 가면 같은 형상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전통 재료인 먹과 채색이 현대적인 추상 구조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판화, 태피스트리, 먹의 재결합
상파울루 비엔날레 이후 뉴욕에 체류하며 박래현은 판화와 태피스트리라는 새로운 매체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1974년 귀국 전시에서 선보인 후기 작업들은 전통 재료의 외형에 머물지 않고, 동판 조각을 조합하거나 날실과 씨실을 엮고 찍어내는 제작 행위 자체가 화면의 구조를 바꾸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먹과 섬유, 동판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완성한 《현상》과 다수의 태피스트리 작업은 그가 구축한 독자적인 한국 모더니즘의 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